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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iamond Sutra

Heathcliff 2023. 6. 5. 19:09

1. 

언젠가 처음으로 스마트 TV를 샀을 때,

유투브 재생이 가능하다는 직원의 설명을 듣고,

왜 그리 불필요한 기능이 있을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퇴근 후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유투브 영상 1,2개 정도는 보는 걸 생각하면,

기술의 발전이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인지 

사람이 변해서 기술의 발전을 따라가게 되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다만 TV에 그런 기능이 없었다면 그 시간에 책이라도 한 줄 더 읽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유투브에 올라와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영상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상을 고르라면,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 X가 만든 <팰컨 헤비>의 추진체가 다시 회수되는 영상과 함께

(https://www.youtube.com/watch?v=OtIMeAt2lTY&t=462s)

현각 스님이 금강경에 대해 강의한 유투브 영상을 꼽고 싶다.

 

 

2.

금강경에서 싯다르타가 수보리에게 하신 말씀인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고, 가없는 중생들을 내 멸도한다 하였으나,

  실로 멸도를 얻은 중생은 아무도 없었어라.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이나 인상이나 중생상이나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는 구절에 대해, 현각스님은 아래와 같이 풀이하고 있다.

 

 

금강경에 대한 현각스님의 이 강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내가 가장 큰 깨달음을 받은 말 중 하나다.

 

버트란드 러셀이 삶을 즐기게 된 비결 중 하나로 <행복의 정복>에서 쓴,

"본질적으로 이룰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깨끗하게 단념한 것"이라는 말과 함께,

내가 삶의 여러 일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는데 가장 큰 도움을 받은 말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게 어떤 것이든 무엇인가를 베풀고 난 후에,

다른 사람에게 그에 대한 답을 바라며 어떠한 기대를 하는 것은 인생의 가장 큰 고통이다. 

현각 스님의 이 강해를 보고 난 후에,

나는 더 이상 그런 종류의 고통은 받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3.

콘라드 로렌츠의 책에 보면, 

"그 당시 나는 일을 지나치게 많이 했으므로 피곤하여 깊이 잠들어 있었다"라는 말이 나온다.

 

내 일 중 하나는 학생 그리고 후배들을 교육하는 게 있다.

단지 "일"이라고만 부르기에는, 사실 내가 하는 것 중 가장 중요하고 뜻깊은 게 아닐까 싶다.

흔히 말하는 학기 초에는 교육과 관련된 여러 일이 너무 많이 겹쳐서,

학기 초 몇 개월간은 일을 지나치게 많이 하곤 하는 것이 벌써 몇 년깨 되풀이되고 있다.

 

그런데 교육을 받는 사람들 중에서는 그동안 나랑 단 한번도 보지 않았던 사람들도 있고,

1,2년 지나면 나랑 어떤 식이로든 사실상 접점이 없게 될 사람들도 있다.

내가 왜 - 학생이나 내 후배가 아닌 - 이 사람들에게까지 내 시간을 들여서 교육을 해야 할까?

이제 체력이 점점 떨어져서인지, 또는 올해는 유독 힘들어서인지,

얼마 전에 매주 반복하는 강의를 하러 가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며칠 뒤, 술기에 대한 교육을 하면서 그런 생각이 더더욱 강하게 들었다.

 

그러한 생각이 일궈낸 고통 속에 현각 스님의 저 말을 반복해서 생각해 보아도,

나와 일면식도 없던 사람을 교육하는 것 때문에 내 시간을 뺏기는 것에 대해 

마음의 안정을 찾기 어려웠다.

왜일까?

 

그 사람들이, 내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거나,

또는 내게 뭔가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애초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 입장에서는 그냥 처음부터 "머리 속이 복잡할 때 도와주는 보시"를 한 것에 불과하고,

그러한 보시의 댓가로 어떠한 것을 바란 것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현각 스님과 싯다르타의 말을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고통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았다.

 

4.

논어 술이편에 보면 공자가 이런 말씀을 한 것으로 나온다.

<한 다발의 육포라도 가지고 와서 예를 갖추면 나는 누구든지 가르쳐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여기에 대해 주자는 이런 해설을 남겼다.

<단지 찾아와서 배울 줄을 모른다면, 찾아가서 가르쳐주는 예라고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를 갖추어 찾아온다면,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주자의 이 해설에 대한 김용옥의 말처럼,

"찾아오지 않는 사람을 가르치러 다닌다는 것처럼 미친 짓은 없"을 것이다.

배움은 공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공짜로 배우려는 사람도 성의가 없는 것이고,

공짜로 가르쳐주려는 사람도 책임감이 없는 것이다.

 

내가 잘 모르고 앞으로도 잘 모를 일부 후배들을 위해 시간 내는 것이 싫어지는 이유는,

그래서 거기에 대해 마음의 고통이 드는 이유는,

찾아와서 배우지도 않는 사람에게

내가 찾아가서 가르쳐주는 미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5.

또는 어쩌면 결국,

이 일은 내가 가지고 있는 그릇에 비해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너무 많아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도덕경 4장에 나오는

<도는 텅 비어있다. 그러나 아무리 퍼내어 써도 고갈되지 않는다>라는 구절에 대해,

천재 철학자 왕필은 불과 16세의 나이에 이러한 주석을 남겼다.

 

"한 집안을 다스릴 수 있는 역량의 소유자는 그 집안을 온전히 다스릴 수 없다.

 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역량의 소유자는 그 나라를 온전히 이룩할 수가 없다.

 있는 힘을 다하여 무거운 것을 든다는 것은 결코 쓰임이 될 수 없다"

 

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정도로 준비된 인간이라면 한 집안을 다스리는 데 그쳐야 하고,

천하를 다스릴 수 있을 정도의 역량이 있어야 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역량과 그릇에 비해 더 낮은 일을 해야,

"비움"이 남게 되고,

그렇게 비움이 남아야 비로소 "쓰임"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은,

매일마다 "있는 힘을 다하여 무거운 것을 들어온" 것에 가까웠다.

 

결국 내 마음과 시간에 "비움"이 없기 때문에 그런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일까?

 

 

6.

혜능 (638-713) 스님이 어느 절에 있던 때, 이러한 일화가 있다.

두 스님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바람이 불어와 깃발이 움직였다.

한 스님이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다" 라고 하자,

다른 스님은 "깃발이 움직이는 거다" 

라고 하며 논쟁이 끝나지 않자, 혜능스님이 말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오직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결국 모든 번뇌, 마음의 고통은 내 마음이 움직여서 나오는 것인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것일까?

 

현재로서는, 그냥 빨리 시간이 지나서 올해 예정된 강의와 교육이 끝나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2023.6.5